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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짧지만 강렬했던 삶, 탈인상주의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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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19세기 후반 탈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붓놀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반 고흐의 생애는 예술적 성취와 개인적 고난이 교차하는 복잡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반고흐의 생애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미술상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빈센트(1789~1874)가 지어준 것인데 반 고흐 가문에서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로 보내졌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1864년에는 집에서 32km 떨어진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빈센트는 거기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서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186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빈센트가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던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교사로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적 완성도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1868년 3월 빈센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빈센트는 후에 자신의 학창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줍니다.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깁니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 순간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20살에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빈센트는 하숙하던 집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이어에게 푹 빠졌지만 외제니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875년에 파리로 전근을 주선했고, 빈센트는 거기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며 분개하였습니다. 결국 1년 후에 해고되었습니다.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합니다. 빈센트는 거기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의 조수가 됩니다. 빈센트는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설교도 몇 차례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집에서는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의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고 낙서를 하거나 성경의 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몰두했고 채식을 하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마치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1886년 3월 빈센트는 파리로 이사합니다. 파리에서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에서 4월부터 5월까지 공부합니다.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여러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된 우키요에 목판화에 대한 관심은 점점 깊어져 수백 점의 목판화를 수집해 파리의 작업실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1887년 11월 테오와 빈센트는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다. 그해 말에는 베르나르, 앙크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몽마르트르의 43번가 드 클리시 거리에 있는 그랑부용 레스토랑 뒤 샬레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여기서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고 빈센트는 폴 고갱과 작품을 교환했다고 합니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습니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반 고흐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1890년 7월 29일,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고흐의 화풍과 대표작품 소개

빈센트 반 고흐는 그의 독특하고 강렬한 화풍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붓놀림, 그리고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반 고흐의 화풍은 파리에 입성한 후 큰 발전을 거치며 아를에 와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습니다. 특히, 고갱과의 싸움 이후 화풍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초기에는 직선적이고 명쾌한 선들, 단순화된 피사체, 짙은 색감이 특징이었으나 아를 시절부터는 일렁이는 곡선과 운동감이 느껴지는 화풍으로 변화했습니다.

반 고흐의 화풍은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분류됩니다. 인상주의는 빛에 의해 변하는 색채를 부각해 풍경이 주는 인상을 담는 것이 특징이며 반 고흐는 이러한 인상주의적 요소와 함께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 별이 빛나는 밤: 반고흐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밤하늘의 소용돌이치는 별빛과 밝은 달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반고흐의 강렬한 감정과 내면세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명한 노란색과 푸른색의 대비, 그리고 강렬한 붓질은 밤하늘과 별들을 표현하며, 별들은 마치 밤하늘에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 해바라기: 반고흐는 해바라기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생명과 에너지, 그리고 색채의 힘을 보여주는 반고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선명한 노란색과 독특한 붓질은 해바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며, 삶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느낌을 전합니다.
  • 자화상: 반고흐는 생애 동안 여러 차례 자기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이 자화상들은 그의 내면세계와 정신적 고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창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

반고흐가 현대에 미친 영향

반고흐의 삶과 작품은 예술과 정신 건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제공합니다. 또한 영화, 음악,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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